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빌헬름 2세 (문단 편집) == 여담 == [[파일:attachment/partition_ching.jpg|width=100%]] 열강이 [[청나라]]를 갈라먹기 위해 서로 이전투구를 벌이는 풍자화에서 외할머니인 [[빅토리아 여왕]], 그리고 7촌이자 사촌매제인 [[니콜라이 2세]][* [[빅토리아 여왕]]의 차녀 [[앨리스 모드 메리]]의 4녀인 [[헤센의 알릭스]]의 남편이다. 헤센의 알릭스는 빌헬름 2세의 이종사촌이므로, 그 남편인 니콜라이 2세는 빌헬름 2세의 사촌 매제로서 그리 멀지 않은 인척이 된다.]와 청나라를 갈라먹기 위해 서로 대립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. 빌헬름 2세 시기에 독일이 청나라의 칭다오를 공격하여 [[키아우초우|점령]]하였다. 그러나 큰 의미는 없었고, 독일을 고립시키는 데만 큰 역할을 하였다. 이 점령은 1차 대전 초기까지 이어졌지만, 이후에 남긴 영향은 [[칭다오 맥주]]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 정도. 그런데 이 칭다오 공격이 러시아의 강경파를 자극했으며, 이 때문에 러시아는 청의 [[뤼순]]과 [[다롄]]을 [[러시아령 다롄|점령]]하여 세계적으로 왕따가 되었으며, 그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러시아는 일본과의 협상에서 저자세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,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[[러일전쟁]]이 발발하였으며,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이기면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. 이런 상황에서 말로만 떠드는 것은 한참 부족하다. 그리고 그 칭다오는 훗날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그 일본에게 정복당한다. 빌헬름 2세는 해당 시기의 영국의 [[에드워드 7세]]를 상대로 공식석상에서 그를 '''[[사탄]]'''이라고 부를 정도였다. 에드워드 7세는 다름아닌 빌헬름 2세의 외삼촌[* 어머니 [[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|빅토리아 황후]]의 남동생.]이었는데 [[패륜|외삼촌이고 뭐고 없었나 보다]]. 빌헬름 2세가 자신을 독실한 기독교도라고 생각하고 자신에 반대하는 자를 '''기독교의 적'''이라고 공공연히 언급했던 것을 생각하면, 빌헬름 2세가 당시 영국의 독일 따돌리기 정책과 그에 편승하는 영국의 동맹국 및 우호국들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. 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]]와 [[아돌프 히틀러]]도 하지 못한 러시아 정벌을 성공한 황제이다. 1918년 3월 [[제1차 세계 대전]]에서 [[소비에트 러시아]]는 [[브레스트-리토프스크 조약]]을 맺고 독일에게 막대한 양의 물자와 영토를 바친다. 표면상으로는 휴전이었지만 명백한 항복이었다. 물론 실질적으로는 [[서부전선]]에서 밀려 항복하는 바람에 의미가 없어졌다. 독일 제국이 항복하자 볼셰비키들은 조약을 파기해 버리고 영토 회복에 나섰지만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던 [[붉은 군대]]는 [[폴란드 제2공화국|폴란드]]에게도 [[소비에트-폴란드 전쟁|지는 추태를 보여]] 결국 잃어버린 영토를 모두 회복하지는 못했다. [[미국]]을 침공할 계획을 세운 황제이기도 하다. [[http://egloos.zum.com/kk1234ang/v/2974975|카이저 빌헬름 2세의 미국 침공 계획]] 참조. 빌헬름 2세가 얼마나 호전적인 인물이였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. 물론 현실은 미국은 커녕 영국도 못 넘었지만. [[1938년]], 히틀러의 [[뮌헨 협정|수데텐란트 요구]]로 [[녹색 작전]]이 실행되면 방첩국 국장보 [[한스 오스터]] 소장이 히틀러를 축출하고 빌헬름 2세를 복위시키려 한 [[오스터 음모사건]]이 계획된 적이 있다.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가 [[뮌헨 협정]]으로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들이며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. [[https://ko.wikipedia.org/wiki/오스터_음모사건|한국어 위키백과의 항목]] 빌헬름 2세는 [[빅토리아 여왕]]의 장녀의 장남인데 빅토리아 여왕이 남긴 자녀가 워낙 많다 보니, 빌헬름 2세의 사촌들이 빌헬름 2세의 장남 빌헬름 황태자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더 어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. 가령 빌헬름 2세의 외사촌 중 한 명인 [[마거릿 빅토리아 샬럿 어거스타 노라|스웨덴 왕세자비 마거릿]]은 [[빌헬름 폰 프로이센|빌헬름 황태자]](1882년생)와 동갑이고, 또 다른 외사촌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[[카를 에두아르트]]는 빌헬름 황태자보다 두 살 어리며(1884년생), 이종사촌인 에스파냐 왕비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제니는 빌헬름 황태자보다 다섯 살 어리다.(1887년생) 하지만 빌헬름 2세의 자식들은 상대적으로 터울이 짧은 편이라 자식이 7명이나 되는데도 나이차가 그리 큰 편은 아닌데, 막내인 [[프로이센의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|빅토리아 루이제 공주]][* 1913년 하노버 왕가의 후계자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결혼하여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부인이 되었으며, 빌헬름 2세의 자녀들 중 가장 장수했다. [[고명딸]] [[프리데리케 루이제|프리데리케]]는 빅토리아 루이제의 사촌동생인 그리스 국왕 [[파블로스]]의 왕비가 되었고, 이후 [[소피아 왕대비|외손녀]]가 에스파냐의 왕비가 되는 것까지 지켜보고 죽었다.]는 장남 빌헬름 황태자와 나이가 10살 차이가 난다. 자동차에 대해서는 탐탁치 않게 여긴 모양이다. 일시적인 유행 정도로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. 그래도 영국처럼 [[적기조례]]같은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